한국기와학보
한국기와학보

제3호 | 제3호 2021_백제 한성기 瓦塼文化의 성립과 전개

페이지 정보

작성자 한국기와학회
작성일22-03-14 14:47 조회783회 댓글0건

첨부파일

본문

백제 한성기 瓦塼文化의 성립과 전개

정치영

(한성백제박물관 학예연구사)

원삼국부터 백제 한성기의 와전은 풍납토성, 몽촌토성, 석촌동 고분군 등 백제 도성을 구성하는 세 유적을 비롯하여 강원, 경기, 인천, 충남의 총 42개 유적에서 확인되었다. 강원 영서와 경기 동부, 경기 북부, 경기 남 부, 충남 북부와 중남부 일원에 해당된다. 동쪽으로는 춘천과 홍천, 서쪽은 김포와 영종도, 북쪽은 포천, 남쪽 은 부여에 이르고 있다. 이 중 경기 남부에 20여 개소의 유적이 위치하여 가장 높은 밀집도를 보인다. 중부지역에서는 가평 대성리의 기원 전 2세기 대 취락에 기와가 유입된 정황이 있고, 기원 전 1세기에는 인천 도서지역에 낙랑과는 다른 제와 전통이 반영된 기와가 존재하였던 상황을 알 수 있다. 기원 후 2세기 후반 이후에는 춘천 우두동이나 화성 기안리에서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북한강유역 및 경기 서남부에 낙랑 제와술과 직접적 관련이 있는 기술 전통을 가진 공인이 활동하고 있었다. 낙랑 제와술의 유입경로는 원산 만 일원에서 동해안과 북한강상류를 경유한 루트와 서해안 및 한강 이북에서 중서부지역으로 연결되는 루 트 등 크게 두 가지 경로가 상정된다. 3세기 전반부터 한강유역에 격자타날을 특징으로 하는 원삼국기 기와들이 등장하는데, 이는 낙랑계 주민 으로부터 습득한 제와술의 재지적 수용이라 할 수 있다. 이와 같은 배경에서 출발한 원삼국기의 제와술은 풍 납토성을 중심으로 한강 중류역으로 수렴되어 백제 기와를 형성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한강유역으로 서 서히 유입되기 시작한 낙랑계 제와술은 제도 및 제철기술과 함께 한강 중류역으로 수렴된 것이다. 이후 점차 백제의 토기 제작기술과 결합하여 현지화되었다. 4세기 중반 이후에는 동진 및 남조와의 교류가 지속되면서 와전문화는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되었다. 낙랑의 기와 제작기술과 한강유역의 토기 제작기술의 습합으로 시 작된 제와술에 육조 와전문화의 요소가 유입되면서 백제 한성의 독특한 와전문화를 형성해 나갔던 것이다. 4세기 이후의 지방 취락에서 출토된 기와는 수량이나 구성, 재질, 사용 맥락 등에서 도성의 양상과는 확 연한 차이를 보인다. 도성에서는 고급 건물의 지붕을 덮은 건축부재였지만, 지방에서 출토된 것은 다소 특 별한 의미가 부여되거나 다른 용도로 전용된 것으로 추정된다. 도성을 중심으로 융성한 와전문화의 편린이 인적 교통과 물류의 유통 과정에서 지방으로 파급된 상황이 반영된 것으로 볼 수 있다.

The Establishment and Development of the tile culture in the Hanseong Period of Baekje

Chong Chi-yong

The tile culture in the Hanseong Period of Baekje was confirmed in 42 ruins in Gangwon and Gyeonggi, Incheon and Chungnam-do province, including three ruins that constitute Capital city including castle of Pungnaptoseong, Mongchontoseong and Seokchon-dong cemetray. In the central region, not only the tile itself but also the production technology were introduced from the 2nd century BC, and in the 1st century BC, there was a different tradition from the Narang in the Incheon book area. After the second half of the 2nd century, as can be seen in Chuncheon Udu-dong and Hwaseong Gianri, there was a public figure with technical tradition directly related to Nakrang in the North River basin and southwestern part of Gyeonggi Province. The inflow route of technic of Nakrang is proposed by two routes, one is from Wonsan Bay to the East Coast and the upper North River, and the other is from the west coast and the north of the Han River to the Midwest. From the first half of the 3rd century, the proto three kingdom period tiles featuring gridtanal appear in the Han River basin, which is the re-intelligent acceptance of rituals acquired from the Nakrang residents. From this background, it can be understood that the first and second phases of the proto three kingdom period were converged to the middle of the Han River, centered on Pungnap Saturn, and formed Baekje tiles. The tile manufacture technic of Nakrang, which began to flow into the Han River basin gradually, was converged to the Han River middle-class station along with the system and steelmaking technology, and it would have been re-established in combination with pottery production technology of Baekje. As the elements of tile culture of the Six Dynasty were introduced the culture of tile was in a new phase after the mid 4th century The tiles excavated from local villages after the late 4th century show a clear difference from the aspects of the capital city, in terms of quantity, composition, material, and use context. In the city, the roof of the high-end building was a first-class building member, but the objects flowing into the province were useful or strange, and in some respects they were given a somewhat special meaning and dedicated to other purposes. The tiles excavated from local villages reflect the situation in which the prosperity of the evangelical culture centered on the capital city is spread to the provinces in the process of distribution of human transportation and logistics.
[이 게시물은 한국기와학회님에 의해 2022-05-16 13:31:23 원문서비스에서 이동 됨]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로그인